불암산 자락

봉숭아

예은박선순 2003. 8. 9. 22:55





    봉숭아


    점점 계절이 무르익어가자 집 뒷뜰에는 꽃들이
    하나 둘, 셋....
    하루자고 나면, 이쁜꽃 한송이 또, 하루자고 나면
    귀여운꽃 두송이 이렇게 피어나던 것이

    아, 지금은 셀 수가 없습니다.
    그 이름을 불러 보자면....
    도라지 보라, 산나리 주황, 금잔화 노랑
    펜지 하양, 분홍,


    그리고 울타리에는 초대받지 않은 허우대 멀쑥한
    신사처럼 우뚜우뚝 서있는 하얗게 핀 개망초 꽃과

    그 이름도 으시시한 가시투성이의 엉겅퀴 보라꽃이
    한데 어울려 아름다운 계절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아직 때가 이른지 양귀비와, 백일홍, 코스모스는
    피어나지 않았습니다. 곧 그들도 그 곱상한 자태를
    들어 내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피어나는 많은 꽃들중에
    봉숭아 붉은 꽃이 눈에 확 뜁니다.

    사실 봉숭아 꽃은 그렇게 아름답다거나 기품이 있다고
    볼 수는 없는 꽃입니다. 코스모스처럼 땅이
    거칠은 곳에도 잘자라는 강인한 생명력을 갖고 있지요.


    봉숭아, 이 이름을 머리에 떠올리자면 왜그런지 모를
    아련한 아픔이 가슴 한구석에 밀려옵니다.
    그 옛날 우리 선조들이 일제의 강점기에


    조국을 잃고 떠도는 아픔을 이 꽃에 빗대어 불렀던
    "울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라는
    노래도 그렀지만

    지금처럼 손톱에 바르는 메니큐어라는 상품이 없던
    코흘리게 시절 생각이 떠오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시절에는 여인들이 치장을 하려면 등짐을 지고
    팔러다니는 방물장사에게서 사 두었던 '구르므'나
    '코티분'이면 다였던 시대였지요.


    그래서 손톱에 예쁘게 물을 들일려면
    봉숭아 꽃물을 드리는 것이지요.

    바로 손위 누님도 예외는 아니어서 봉숭아꽃이
    필 이맘 때, 해가 늬엿늬엿 서쪽 산으로
    석양을 붉게 물들여 놓고 넘어갈 즈음이면

    저 멀리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논, 밭을 지나
    방죽 넘어 물빛깔이 너무 맑아 밑바닥 모래까지
    들여다보이는 실개천에서 넙적다란 자갈을
    골라 미리 준비해 놓고 나를 부르곤 했습니다.


    그러면 내 소꼽친구 '순희'도 덩달아 나를
    쫄래쫄래 쫓아 오는 것입니다.
    무어 내가 좋아서 쫓아 오겠어요, 속 생각이
    달라서 쫓아 오는 거겠지요.

    넙적한 자갈 위에다 봉숭아 붉은 꽃잎, 봉숭아 잎파리
    그리고 수정처럼 마알간 '백반'을 꼭 같이 넣어서
    빻아야 은은하게 꽃물이 잘 듭니다.

    콩콩콩, 쿡쿡쿡, 자근자근 잘게 곱게 잘 빻아서
    고놈을 누님의 하얀 손가락 끝 손톱위에다
    적당량을 떨어지지 않게 살포시 올려 놓고


    헝겁 천으로 감싼 다음 하얀 무명실이 둘둘둘
    감겨있는 실패에서 실을 끊어다, 감싼 천이
    헹여 떨어지거나 풀려지지 않게 꼭 매어 놓아야
    합니다. 그럴라 치면 내 이마에선 진땀이 다
    몽골몽골 솟아 납니다.

    더러는 도중에 꿀밤도 맞지요.
    '야, 흘리지 말고 잘 싸란 말이야!'하면서 말입니다.
    이렇게 누님 손가락 마디마디 마다 작품아닌 작품을
    만들어 놓으면, 내 짝꿍 '순희'가 가만 있을리가
    없지요.


    '야, 나두 해주라!'하고 툭 틔어 나옵니다. 그러면
    '쬐끄만게, 뭘 그딴 걸 할려구....'내가 퉁명을 줍니다.
    그럼 옆에서 누님이 '얘, 게도 좀 해줘!'그럽니다.
    그 소릴 들은 '순희'는 의기양양해서 입술을 쏘옥 내밉니다.

    '자, 손가락 이리내 봐!'그러면 양손을 내 앞가슴에다 종주먹을
    내지르듯 쑤욱 내밉니다. '아니, 손가락만 내밀라구...시이!'


    작은 종지만한 가녀린 주먹이라 '순희'의 손톱이 너무작아
    봉숭아 물을 들이기 위해 천을 감싸기가 결코 쉬운일이 아닙니다.

    겨우겨우 해놓으면 나에게 퉁박을 줍니다.'야, 예쁘게 잘
    할 수 없어?'하고 눈을 살짝 흘깁니다.
    '뭐 그게 어때서, 잘 됐잖아!'하고 나는 우깁니다.

    이렇게 열 손가락에다 천을 칭칭 감아 놓으면 즐거운지
    '순희'는 싱글벙글입니다.


    그 다음날 이른 아침이면, 나는 아직도 늦잠을 자느라
    이불속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대문밖에서 나를
    부르는 '순희' 목소리에 겨우 눈을 뜹니다.

    '야, 이것봐 꽃물이 예쁘게 들었지?'하고 나의 동의를
    구합니다. 그러면 나는 퉁명스럽게'이쁘긴...?'
    '자, 여기 사탕 먹어!'순희가 손바닥을 살짝 펴 보입니다.


    그제서야 나는 '응, 정말 이쁘다.'하고 말해줍니다.
    그러면 내 단짝 '순희'는 붉으레 홍조띤 얼굴에 보조개를
    지으며 미소를 짓습니다.

    얼굴이 작아 유난히 두 눈동자가 커 보였던 그네의 웃는
    얼굴은 정말 예쁘고 아름답습니다. 그네의 티없이 환희
    웃음짓는 얼굴을 쳐다보는 나는 그만 정신이 아득해 집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이렇게 봉선화 붉은 꽃을 보고 옛일을
    회상하는 나 처럼 그네도 지금쯤 어느 하늘 아래서
    이런 생각을 가져나 볼려는지.....

    * 자운암 *